나는 집안의 첫 손주였다. 덕분에 나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 이모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나름 똘똘했던 나는 온 가족의 사랑만큼이나 기대도 많이 받았다. 그때 나는, 어른스럽고, 뭐든 잘 해내는 어린이였고, 그대로 어른이 되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자랑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항상 부족하고, 철없고, 열등했다.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매일매일 나를 꾸짖고, 비난했다. 나는 어떤 일을 아무리 잘 해내도, 만족할 수 없는 완벽주의자로 자랐다. 완벽주의자는 영원히 완벽해질 수 없는 고통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이런 고통 속에, 한동안 내가 완벽주의자가 된 것은 많은 부분 가족들의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으며, 그때 내가 받은 것이 기대가 전부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랑도 너무너무 넘치게 받았다.
내가 받은 것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으며, 계속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글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자랐는데…
나는 가족들의 많은 기대와 격려 속에 자라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랑 속에 자라기도 했다.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소소한 오해와 불만은 시간 속에 잊혀지고 추억이 되지만, 깊어진 상처와 원망은 시간과 함께 괴물이 된다.’
이 말처럼 나는 내 상처를 키워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랑
어린 시절 나는 집안의 첫 손녀로 온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고, 밥벌이로 바쁜 부모님 덕분에 적당한 무관심속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특이, 고3 딸을 끝없이 모르는 척 해 준 부모님의 사랑과 인내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는 부분이다.
너무 많은 사랑 속에 자란 나는 내가 받은 사랑을 알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다 모른다. 분명히 더 있을 테지만, 생각하면 아팠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런 면에서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아는 작가가 부럽다.
돌아온 길
제일 부러웠던 부분은, 할머니께서 작가의 예민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부분이다. 어린시절부터 나의 성격적 특성 중 한 부분은 항상 부정적이고, 고쳐야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간을 돌아돌아 와서야 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제자리에 와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부모님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한다.
그렇지만, 돌아돌아 가는 이 길에 항상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이 있었다. 그 든든함으로 나는 그 먼 길을 돌아왔다. 그게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예전에 고꾸라졌을지도 모른다.
돌아돌아 온 덕분에 얻은 것도 많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 라는 말에 100% 동의한다. 부모님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다 하더라도, 나는 아마 다른 빈틈을 찾아서 상처받고, 또 거기서 자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PT, 요가, 테니스, 수영, 볼링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시도해본 운동들이다. 어떤 건 몇 번하고 그만 두었고, 어떤 건 몇 년째 계속 하고 있다.
나는 운동에는 정말 꽝이다.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나는 체육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나의 체력장 성적은 반에서 최하위였다. 달리기도 느렸고, 오래 달리기 마저 꼴등으로 들어오면서도 끝나면 헛구역질을 하곤 했다. 이단 줄넘기도 하나도 못넘었고, 몸이 느려 피구를 해도 항상 제일 먼저 공격당했다. 이러니 뭐 체육 성적이 좋았을리 없다. 체육 실기는 항상 최하위였다. 노력을 안해본 것도 아니지만, 하루 아침에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체육을 싫어하게 되었고, 난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운동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30대의 어른이 되었고, 이제는 살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나는 정말 운동 신경이 없다는 것이고, 운동 신경이 없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운동선수로써 기록을 낼 것도 아닌데 체육 선생님들은 왜 내 운동 능력에 점수를 매겼을까? 체육시간에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체육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생 나와 함께할, 나에게 맞는 즐거운 체육활동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이단 줄넘기를 10개 뛰느냐, 1개 뛰느냐의 신체 능력은 하나도 중요한게 아니었는데, 학교 체육시간의 목표는 오로지 그것뿐이었고, 나는 그걸로 점수 매겨지고 줄세워졌다.
이젠 아무도 나를 점수 매기지 않고 아무도 줄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운동을 배울때마다 너무너무 신나고 행복하다. 비록, 비루한 운동신경으로 남들보다 2배의 노력, 2배의 시간이 들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2배로 시간을 들이고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가면 된다. 2배의 노력으로도 안되면 어쩔 수 없다. 그냥 3배 더 하는거다. 이 악물고 말고 즐겁게. 지금은 아무도 나를 C라고 점수 매기고, 좌절해서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학창 시절의 체육 시간은 없느니만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즐거운 운동을 시작하는 것을 수백번 망설이고, 피하게 만들었으니까.
체육 시간뿐 아니라 모든 학습에 점수 매겨지고 줄세워졌던 학교에서의 활동들은 다 비슷한 결과를 만든 것 같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서 잘 하거나, 잘 못하는 것은 아예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내가 탄생했다. 경쟁에 최적화된 사회인으로 길러져서 종종 경쟁에 내 행복을 포기하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운동에서 줄세워지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나를 나대로 받아 들였을 때 느끼는 이 즐거움처럼 나의 일, 일상에서도 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